'끼워넣기(deployment)'란 무엇인가
deployment는 우리말로 '전개·배치'인데, AI 전환의 맥락에서는 '기존 업무 순서는 그대로 둔 채 그 사이사이에 AI를 꽂아 넣는 방식'을 뜻합니다. 원래 하던 일의 절차를 잘게 나눠 태스크(작업 단위)로 세우고, 그 태스크 사이에 AI를 적당히 넣어 속도만 올립니다. 하던 방식은 그대로이고 도구만 바뀐 셈입니다.
이 흐름은 새로운 게 아닙니다. 아이폰이 나오고 모바일이 화두이던 시절, 많은 기업이 CDO(Chief Digital Officer, 최고디지털책임자)라는 임원 조직을 만들어 그 사람을 중심에 두고 디지털 전환을 밀어붙였습니다. 지난 2~3년의 AI도 비슷했습니다. AI 담당 임원(CAIO, Chief AI Officer)을 두고 '우리도 AI 열심히 한다'고 말하는 단계까지는 거의 모든 회사가 같았습니다.
문제는 이 방식으로는 손발만 빨라진다는 점입니다. 6개월 걸리던 일을 조금 빨리 하는 수준에 그치고, 정작 시장에서 이기는 방식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AI를 넣긴 넣었는데 경쟁의 판이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리셰이프(reshape)'는 어떻게 다른가
리셰이프(reshape)는 '다시 빚는다'는 뜻으로, 업무에 AI를 끼우는 게 아니라 일의 순서 자체를 갈아엎는 것을 말합니다. BCG는 AI 전환의 핵심을 여기에 둡니다. 같은 AI를 쓰더라도 끼워넣기와 리셰이프는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신제품 기획을 예로 들어 봅니다. 소비재 기업이 신제품 하나를 개발하고 기획하는 데는 보통 6개월에서 1년이 걸립니다. 끼워넣기 방식이면, 기존 개발 절차를 그대로 태스크로 세워 놓고 사이에 AI를 넣어 각 단계를 조금씩 빠르게 만듭니다. 순서는 그대로입니다.
리셰이프는 순서를 다시 짭니다. 과거엔 하나의 기회 관점(어떤 제품을 어떤 고객에게 팔지에 대한 하나의 가설)에 6개월~1년을 통째로 붓습니다. 리셰이프에서는 AI로 시장을 분석하며 기회 영역을 식별하도록 돕고,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신제품 기회 관점을 빠르게 동시에 만들어 냅니다. 그다음 성공 확률이 높은 쪽으로 좁혀 갑니다. 이렇게 하면 6개월~1년이 1~2개월로 줄어듭니다.
핵심은 '빨리 했다'가 아니라 '순서를 바꿨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의 가설에 오래 매달리던 방식을, 여러 가설을 동시에 열고 좁혀 가는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기존 프로세스에 AI를 꽂은 게 아니라 신제품 기획이라는 일의 뼈대를 다시 세운 것입니다.
기업의 뇌(Enterprise IQ)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 재설계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건 AI라는 도구가 아닙니다. BCG는 그 지점을 '기업의 뇌', 즉 Enterprise IQ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시장을 어떻게 관찰하고, 어디서 인사이트(남들이 못 본 기회나 통찰)를 뽑아내는지에 대한 우리만의 논리입니다.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AI는 손발을 빠르게, 그리고 여러 개로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손발의 진짜 값어치는 빠르기나 개수가 아니라, 그 손발이 '우리 시장에서 이기는 전략을 심은 뇌'와 함께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뇌 없이 빨라진 손발은 방향 없이 바쁠 뿐입니다. 성패는 이 Enterprise IQ를 얼마나 잘 길러 놓았는가에서 갈립니다.
중요한 건 이 뇌를 외부가 대신 만들어 줄 수 없다는 점입니다. OpenAI도, 팔란티어(Palantir, 대형 데이터 분석 기업)도 이 부분은 못 만듭니다. 우리 회사의 논리를 이해하는 회사 자신만 만들 수 있는, 내재화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AI 모델이나 솔루션을 사 온다고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질문의 순서가 바뀝니다. '어디에 AI를 쓸까'가 아니라 '좋은 신제품이 성공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이겨 왔는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AI는 그 이기는 논리를 실행에 옮기는 손발일 뿐입니다.
왜 대부분은 실패하는가 — '열심히 하는 착시'
많은 기업이 AI를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성과를 내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가장 흔한 함정은 'AI 전환'이라면서 정작 '전환'이 아니라 AI 기술 도입 그 자체에 빠지는 것입니다. AI는 수단인데 어느새 목적이 됩니다.
여기서 '열심히 하는 착시'가 생깁니다. 끼워넣기 방식으로 여기저기 AI를 넣으면, 겉으로는 회사가 AI를 아주 적극적으로 잘 다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들여다보면 'AI를 1년 넘게 돌렸고 돈도 많이 썼는데, 실제로 뭐가 바뀌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빠 보였지만 판은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대표적 사례가 골드만삭스입니다. CEO 데이비드 솔로몬은 2024년 이전에는 100개가 넘는 POC를 동시에 돌리는 방식으로 전사 AI 전환을 밀어붙였다고 말했습니다. POC(Proof of Concept, 개념검증)란 '이게 되는지' 시험 삼아 작게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성공을 만들지 못했고, 실패를 인정한 뒤 2024년부터는 근본을 건드리는 가장 중요한 5~6개에 집중하는 철학으로 방향을 크게 틀었습니다. 100개를 벌이는 것보다 뿌리를 바꾸는 소수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교훈입니다.
진짜 난관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 — AX의 70%
AI 전환을 어렵게 만드는 건 기술이라고들 생각합니다. 모델이나 데이터, 인프라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더 어려운 쪽은 그것을 이끄는 조직과 사람, 그리고 체인지 매니지먼트(change management, 조직의 일하는 방식과 태도를 바꾸는 관리)입니다. BCG는 AI 전환 어려움의 약 70%가 사람과 관련된 문제라고 봅니다.
그래서 AI 전략을 조언하고 플랫폼과 개발을 설계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고 사람이 어떻게 바뀔지에 훨씬 더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AI라도 실제 관행과 프로세스, 필요하다면 조직 구조의 변화가 함께 가지 않으면 성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신기술 도입을 명분으로 재설계를 하면서 사람의 일하는 방식이 그대로라면, 그 전환은 절반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 톱다운과 한국 기업의 기회
먼저 톱다운, 즉 최고 경영진이 직접 끌고 가는 방식이 갈수록 중요해집니다. CEO가 AI를 직접 오케스트레이션(전체 과정을 조율·지휘)하며 크게 투자하는 회사, 중간 정도로 두는 회사, 그렇지 않은 회사를 비교하면 성과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승자와 패자가 뚜렷해집니다. 어려움을 각오하고 위에서부터 밀어붙이는 결단이 사실상 성공을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BCG는 말합니다.
여기에 한국·아시아 기업에는 특별한 기회가 있습니다. AI 시대에는 앞서 있는 곳이 사실상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새로운 기술이라 모두가 함께 씨름하는 중입니다. 한국 기업은 이런 변화에 대한 수용성과 적극성이 유독 높습니다. 예컨대 소비재의 핵심인 마케팅은 과거 막대한 자본을 가진 서구 대기업이 밀어붙이면 이기기 어려운 게임이었습니다. 그런데 AI의 힘으로 훨씬 적은 비용에 마케팅을 실행할 수 있다면, 그 게임판을 저비용으로 뒤집어 볼 만합니다.
자동차·조선, 최근의 화장품·식품처럼 한국이 잘하는 대규모 산업들은 AI로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영역입니다. 미국이 파운데이션 모델(GPT·Claude 같은 기반 AI 모델)과 핵심 기술에서 앞서 있는 건 맞지만, 그것을 실제로 잘 활용하는 데서까지 미국이 가장 앞섰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활용의 게임은 이제 시작이고, 여기서 앞서는 나라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실무자를 위한 출발점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가 시장에서 이겨 온 방식'을 말로 꺼내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 이기는 로직이 지금 문서가 아니라 몇몇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다면, 그것을 AI에 심을 방법도 없습니다. '우리 회사의 이기는 논리는 지금 누구의 머릿속에만 있는가'를 먼저 물으십시오.
그다음, AI를 어디에 끼울지 목록부터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 핵심 업무(신제품 기획·영업·마케팅 중 하나)를 골라, 그 일의 순서를 백지에서 다시 설계해 보십시오. 'AI가 여러 관점을 동시에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이 업무의 순서는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물으면 리셰이프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에 100개를 벌이지 말고 근본을 건드리는 5~6개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기술만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과 조직의 변화를 처음부터 함께 설계하십시오. 손발을 아무리 빨리 만들어도 심을 뇌가 없으면, 남는 건 돈만 쓰고 무엇이 바뀌었는지 모르는 시간뿐입니다.